누군가의 어깨에 손을 얹으며
그리스도의 품에서 쉬고 있는 성 요한 <콘스탄츠의 마스터 하인리히 作,1320>
From the Dominican conventin Sankt-Katharinenthal (Switzerland).
Museum Mayer van den Bergh,
누군가의 어깨에 손을 얹으며
김영수 신부
예사롭지가 않다. 지금까지 내 눈에 익숙하게 아로새겨진 예수님의 모습과는 사뭇 다른 뜻밖의 예수님을 이 조각상에서 맞닥뜨렸기 때문이다. 요한의 오른 손은 예수님의 손에 이끌려 있고 그는 자신의 어깨를 감싸 안은 예수님 품에 기댄 채, 잠을 자는 듯 두 눈을 감고 있다. 자신의 의지와 살아있음의 모든 요구를 기꺼이 넘겨 드리고 넘겨받은 신비로운 교환이며, 진실로 사랑하는 사람들에게서가 아니고는 감지할 수 없는 일체감이다. 누군가 말했다. 예술적 역량이란, 진실을 직시하고 그것을 독창적인 수법으로 그려내는 역량이라고. 작가는 하느님과 우리를 풀어; 사랑,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라는 진실을 이 작품 안에 쏟아 부은 듯 느껴진다.
이 조각상은 원래 수세기 동안 어느 수녀원의 기도방에 있었던 작품으로 수녀들에게 기도의 의미를 보여주는 본보기가 되었다. <웬디 수녀의 유럽미술 산책>에 소개된 수녀님의 담담한 해설을 읽으면 기도에 대한 특별한 깨달음을 얻게 된다.
“기도는 질문하거나 이야기하는 시간이 아니라, 사랑하는 시간이 되어야 한다. 기도란 하느님의 마음에 나의 머리를 기대는 것이며, 그 분은 이미 모든 것을 알고 계시다는 것을 확신하는 완전한 복종을 의미한다.” <웬디 수녀의 유럽미술 산책 pp.212-214, 웬디 베케트 지음. 김현우 옮김, 예담>
이상한 일이다. 누가 내 어깨에 손을 얹으면 무거워져야할 텐데, 오히려 가벼워진다. 고등학교에 다닐 때, 꽤 큰 사고를 저질러 아버지가 학교로 불려가셨다. 선생님 앞에서 머리를 조아리고 혼이 나셨던 아버지는 가슴을 졸이며 두려워하는 나에게 아무 말씀도 않고 다만 조용히 내 어깨에 손을 얹고 다독여 주셨다. 그때 내 마음은 말로 다할 수 없이 평안하고 가벼워졌다. 소리 없이 눈물을 흘리는 내 손을 아버지는 꼭 잡아 주셨다.
우리는 왜 예수님 앞에 나아가는가? 짓눌리고 무거운 내 마음을 그분이 평안으로 바꾸어 주시기 때문이다. 그분이 내 어깨에 손을 얹으시면 무거운 내 마음은 새털같이 가벼워지고 그분이 내 손을 붙잡아 주시면 절망은 희망으로 바뀌고 나약함과 연약함은 능력으로 바뀐다. 지금 예수님의 왼손은 내 왼쪽 어깨에 놓여 있다. 그리고 오른손으로는 내 오른손을 붙잡고 계신다. 그리고 그분의 두 볼이 사랑의 환희로 상기되어 있다.
예수님은 인생의 무게에 짓눌린 우리가 그 품에 기대어 쉬기를 원하신다. 다만 우리가 그 사랑을 믿고 응답하시기만을 기다릴 뿐이다.
“나는 너희를 친구라고 불렀다. 내가 내 아버지에게서 들은 것을 너희에게 모두 알려 주었기 때문이다.” (요한 15,15)
- 쌍백합 53호(2016여름).hwp (198.5KB) (0)