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천호성지의 역사

천호성지의 역사
천호성지는 1839년 기해박해를 전후하여 박해를 피해 천호산 일대에 들어와 신앙공동체를 이룸으로써 비롯되었다.

천호성지 전체지도


     

가을 나무와 십자가

박물관 | 2018.04.19 11:35 | 조회 93

가을 나무와 십자가


먼 산을 넘고 대지를 가로지르며 불어온 바람이 묵묵히 서 있는 가을 나무를 흔들고 지나간다. 그 바람에 흔들릴지언정 자신이 뿌리를 내린 곳에 곧게 서 있는 나무는 성실하다. 나무는 깊은 산속이든, 바위틈이든, 사람들이 오가는 길거리이든 자신이 심겨진 곳에서 생명의 몫을 다한다. 봄볕에 새순을 틔우고, 가지를 키워내며, 묵묵히 자신의 자리에 서서 비바람을 견디어내고, 한 여름의 뙤약볕을 온몸으로 받아 짙푸르게 그을리며 양분을 비축하고 열매를 키워낸다.

햇살이 기우는 가을날, 그 푸르던 잎이 시들어 땅 위에 떨어져 내릴 때까지 나무는 어떤 도전에도 결코 무릅꿇지 않고 자신의 시간을 살아내는 것이다. 그 풍성한 결실을 아무 대가없이 세상에 내어 놓는다. 그리고 말없이 또 다시 새로운 계절을 준비한다. 나무는 그 성실함으로 긴 겨울을 견디어 내고, 봄을 맞이한다.

 

이 초가을 아침, 내 뜰 앞에 곧게 서 있는 나무 한 그루가 자신의 몸으로 전해주는 생명의 신비를 묵상하며 나는 하느님을 그리워한다.

나무는 겸손하다. 생명의 몫을 다하기 위해 푸른 잎과 수많은 열매를 달아맸던 나무는 스스로 자신의 시간에 충실할 줄 안다. 더 많은 것을 가지려고 하지 않는다. 허락된 시간만큼 최선을 다해 일하고는 스스로 물러날 줄 아는 겸손함이 있다. 가을 나무의 겸손함이 풍요로운 열매를 나누게 하고, 고요히 새로운 생명을 잉태하게 한다.

 

나무는 헌신적이다. 비바람 몰아치는 계절에도, 햇볕이 내리쬐는 한여름의 열기 속에서도 온몸으로 생명을 지켜낼 줄 안다. 가을 나무는 자신의 일부인 낙엽을 떨구고 긴 겨울 속에서도 새로운 생명을 준비한다. 헌신은 자신의 죽음으로써 다른 생명을 살리는 것이다. 온전한 헌신만이 생명을 열매 맺는다.

뿌리 깊은 나무들은 바람을 따라 살지 않는다. 떠나보내야 할 것들을 바람과 함께 떠나보내고 자신의 뿌리에 더욱 힘을 북돋운다. 정착한다는 것은 자신의 삶 속에 견고하게 뿌리를 내리는 일이다. 뿌리가 견고한 생명은 자신이 서 있는 자리에서 오가는 것들에 자신을 내어 맡기지 않는다. 다만 오는 것을 맞아들이고 가는 것들을 보낼 줄 안다.

가을 나무를 바라보면 예수님을 생각하게 된다. 하늘에서 내려와 이 세상에 뿌리를 내리셨던분, 온몸으로 세상의 불의와 거짓의 광풍에 맞서 허울과 위선의 넝쿨을 걷어내고 마침내 자신을 내려놓아 영적인 생명의 열매를 나누어 주신 분.

 

이제 그 자리에 내가 서 있다. 세상 한 복판에. 지금 내가 서 있어야 할 그 자리에 한 그루의 나무처럼 서서 한낮의 태양과 비바람 부는 밤을 견디어 내는 것은 하느님의 생명을 열매 맺는 시간을 기다리는 희망으로 살아내는 것이다. 오직 사랑만이 그 시간을 기다리고 견디어 내는 힘이다.

 

보라, 십자나무. 여기 세상 구원이 달렸네

   

김영수 헨리코 신부(치명자산성지)